신앙의 신비여
사제 생활 50년의 단상
왕영수 신부 지음
3. 치유의 시간, 치유의 은사
02 선종(善終)의 은혜
"신부님, 앞으론 신부님이 병자성사 주는 곳에 같
이 가고 싶지 않습니다."
나와 동행하면서 기도도 하고 성가도 같이 해주던 수녀님이 어느
날 내게 말했습니다. 의아해하며 돌아보는 내게 수녀님이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신부님과 같이 환자 방문을 하고 나면 환자들이 빨리 죽습니다.
환자 봉성체와 병자성사에 신부님과 3개월 정도 동행했는데 그동안
에 벌써 몇 사람이나 하늘나라에 갔습니다."
우리가 가지 않으면 그렇게 빨리 죽지 않을 수도 있을 텐데 하는
죄책감 때문에 괴롭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생명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삶을
선택하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생에 대한 애착은 인간의 본능이
며, 죽음은 누구에게나 두렵고 피하고 싶은 생의 끝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는 죽음도 또 하나의 생명을 얻는 관문입니다. 영원
한 생명에 이르기 위해 우리는 반드시 죽음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
죽음을 잘 맞이하기 위해 교회는 앓고 있는 이들을 위해 거룩한 병
자성사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병자성사는 치유의 성사입니다. 예수님이 병자들을 고쳐주셨듯
이, 육신을 치유함으로써 건강을 회복하여 일터로 돌아가고, 또 주
님이 원하시는 선종을 할 수 있도록 영혼의 치유와 은총을 구하는
기도를 합니다.
"수녀님, 죽을 사람이 잘 죽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선종하는 것
은 가장 완전하고도 영원한 치유입니다. 그것이 바로 병자성사의
핵심입니다. 일생 동안의 죄를 용서받고 치유받아서, 주님의 부르
심을 받아들이고 두려움을 극복하고 편안히 주님께로 돌아가게 해
달라는 것이 병자성사의 중요한 기도이고 전례입니다."
"죽는 것이 완전하고 영원한 치유입니까? 모든 환자들이 조금이
라도 더 생명을 연장하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고 심지어는
미사까지 드리는데요. 신부님, 저는 환자 앞에서 이 환자가 빨리 편
안하게 죽게 해달라고 기도할 용기도 없고 해본 적도 없는데요."
나는 수녀님에게 환자들과 면담도 하고 고해성사도 하고 안수도
하고 성체를 모시게 하는 병자성사를 통해 환자가 지난날의 죄와 상
처와 아픔에서 해방되는 모습을 많이 보아왔고, 그들이 평화롭게 죽
음을 맞이하는 모습을 보아왔다고 얘기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진심으로 하느님께 빨리 돌아가고 싶어 하는 걸 본 적도 있
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수녀님, 저는 가끔 가다가 빨리 죽는 것에 대해 대화도 하고 기도
도 해드립니다. 소생할 수 있는 병이라면 빨리 쾌유하는 것이 은혜
겠지요. 그래서 저는 환자와 대화할 때나 기도할 때 주님의 뜻을
분별해서 쾌유나 선종의 은혜를 달라도 기도하는데, 지금까지 싫어
하는 분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어차피 죽을 수밖에 없는 병이
라면 환자 자신이나 가족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라도 최소한
의 임종 준비 기간을 갖는 것이 필요한 일 아니겠습니까?"
"신부님의 말씀이 옳은 것 같고, 병자성사의 은총을 오늘 새삼스
럽게 다시 한 번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과 다르게 신부
님은 치유의 은사(恩赦)가 있다고 느껴집니다. 앞으로는 신부님과
함께 기쁘게 봉사하면서 많이 배우기로 하겠습니다.
1991년 20년 만에 귀국한 후 첫 본당이었던 초장 성당에서의 일
이 었습니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병에서 회복할 수 있는 환
자에게 회복의 은혜를 구하는 한편, 회복이 불가능한 환자에게 생의
마지막을 은혜롭게 마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죽음을 하느님
의 뜻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죽음을 극복함으로써 영원한 생
명에 대한 희망과 기쁨을 안고 세상의 삶을 마감할 수 있도록 은총
을 구하는 병자성사는 우리 삶을 정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성사인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병자성사 때 면담고해를 권고합니다. 인생을 살아오
면서 마음 아프고 가슴에 지워지지 않았던 상처가 무엇인지, 고해성
사는 보았지만 그 죄의식에서 헤어나지 못한 어떤 잘못이 있는지,
한 생애를 통하여 가장 한(恨)이 되었던 것은 무엇인지, 앞으로 치유
되어 건강하게 산다면 꼭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등을 질문하고
경청합니다.
그리고 치유기도와 함께 사죄경(赦罪經)을 해드립니다. 저와 봉사
자, 유가족이 번갈아가면서 치유안수도 해드리고, 치유와 건강을 위
한 성가도 심령을 다해서 노래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몸인 성
체도 모시도록 하고 마지막 기도와 함께 환자를 위한 장엄강복(장엄
강복)으로 예식을 마칩니다.
이런 전례를 통하여 환자들이 건강을 회복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내적인 치유를 받고 아주 평온하게 임종을 하는 모습을 자주 보아왔
습니다. 인간의 마지막 두려움의 대상인 죽음을 초월하는 병자성사
의 특별한 은총을 체험하면서 '사제가 된 것이 잘한 일이구나!' 이런
생각과 함께 사제생활에 새로운 활력을 얻게 됩니다. 하느님과 교회
에 대하여 새롭게 감사하는 마음이 더 깊어만 갑니다.
오늘 같은 내일의 연장이지만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기도
할 시간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시간의 길이를 바꾸고 싶은 것은 어
쩌면 인간의 욕심인지도 모릅니다.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한 인생
의 마지막이 아름답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항시 함께 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