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성지

절두산

사랑의 기쁨 2013. 11. 21. 17:11

한강변 고수부지에서 본 잠두봉과 절두산 순교자 박물관 모습.한강변에 우뚝 솟은 봉우리의 모양이 누에가 머리를 든 것 같기도 하고 용의 머리같기도 하다고 해서 잠두(蠶頭) 또는 용두(龍頭)로 불리던 서강(西江) 밖의 봉우리가 절두산(切頭山)이 된 데에는 가슴 시린 아픔이 있다.
 
대원군이 자신의 쇄국 정책을 버티어 나가기 위해 무자비한 살육을 자행함으로써 당시 절두산에서만 무려 1만여 명의 교우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추산되지만 그 수가 맞는지 틀리는 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선참후계(先斬後啓), 즉 "먼저 자르고 본다."는 식으로 무명의 순교자들이 아무런 재판의 형식이나 절차도 없이 광기 어린 칼 아래 머리를 떨구었고 그래서 29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원래 잠두봉 또는 용두봉은 예로부터 풍류객들이 산수를 즐기고 나룻손들이 그늘을 찾던 한가롭고 평화로운 곳이었다. 도성에서 김포에 이르는 나루터 양화진(楊花津)을 끼고 있어 더욱 명승을 이루었던 곳으로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꼭 유람선을 띄웠다고 전해져 온다.
 
하지만 병인년인 1866년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까지 침입해 오자 대원군은 "양이(洋夷)로 더럽혀진 한강 물을 서학(西學)의 무리들의 피로 씻어야 한다."며 광기 어린 박해의 칼을 휘두른다. 당시 대원군은 일부러 천주교도들의 처형지를 이전의 서소문 밖 네거리와 새남터 등에서 프랑스 함대가 침입해 왔던 양화진 근처, 곧 절두산을 택함으로써 침입에 대한 보복이자 '서양 오랑캐'에 대한 배척을 표시했다.
 
성지 마당의 순교자를 위한 기념상.1868년 남연군 무덤 도굴 사건, 1871년 미국 함대의 침입 등의 사건은 대원군의 서슬 퍼런 박해에 기름을 퍼붓는 꼴이 되어 살육은 6년간이나 계속됐고 병인박해는 한국 천주교회사상 가장 혹독한 박해로 기록된다.
 
절두산에서 순교한 기록에 있는 맨 처음 순교자는 이의송(프란치스코) 일가족으로, 그 해 10월 22일 부인 김이쁜(마리아), 아들 이붕익(베드로)과 함께 참수됐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이렇듯 이름과 행적을 알 수 있는 22명과 단지 이름만 알려진 2명 그리고 이름조차 알 수 없는 5명을 합해 29명 외에는 아무런 기록도 전해지지 않는 무명 순교자들이다.
 
1966년 병인박해 1백주년을 기념해 그 옛날 수많은 순교자들이 목을 떨구었던 바로 그 자리에 순교 기념관이 선다. 무심히 흐르는 한강물 속에 애달픈 사연들은 기념관이 서고 순례자들의 발걸음이 머무르면서 오늘날에 다시 되살아난다.
 
우뚝 솟은 벼랑 위에 3층으로 세워진 기념관은 우리 전통 문화와 순교자들의 고난을 대변해 준다. 접시 모양의 지붕은 옛날 선비들이 전통적으로 의관을 갖출 때 머리에 쓰는 갓을, 구멍을 갖고 있는 수직의 벽은 순교자들의 목에 채워졌던 목칼을, 그리고 지붕 위에서 내려뜨려진 사슬은 족쇄를 상징한다.
 
웅장하게 세워진 절두산 기념관은 순례성당과 순교 성인 27위와 1위 무명 순교자의 성해를 모신 지하묘소 그리고 한국 교회의 발자취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수많은 자료와 유물들이 전시돼 있는 전시관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절두산 순교자 기념성당 지하의 성해실 모습. 27위 성인과 1위 무명 순교자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특히 기념관에는 초대 교회 창설에 힘썼던 선구 실학자 이벽, 이가환, 정약용 등의 유물과 순교자들의 유품, 순교자들이 옥고를 치를 때 쓰였던 형구(刑具)를 비롯해 갖가지 진귀한 순교 자료들이 소장돼 있다. 그중에서도 두 번째 신부였던 최양업 일대기 31점과 유중철 요한과 이순이 루갈다 동정부부 일대기 27점은 귀중한 자료로 꼽힌다.
 
절두산 순교 기념관은 2001년 신유박해 순교 200주년을 맞아 절두산 순교 박물관으로 이름을 바꾸고 명실상부한 전문 박물관으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했고, 2004년 개축공사에 이어 2007년 첨단 시설을 갖춘 수장고를 설치하고, 2009년에는 '전시장'으로서의 역할보다 박물관 본연의 역할에 더욱 충실하기 위해 시설 보완을 거쳐 절두산 순교성지 박물관으로 재개관했다. 교회사적으로 중요한 자료 4,5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는 절두산 순교성지 박물관은 전시실을 최대한 '열린 공간'으로 살려 특별전, 기획전 및 초대전까지 유치할 수 있는 가변적 시설로 설계해 보다 다양한 유물들을 관람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또 박물관 광장에는 김대건 신부의 동상, 오타 줄리아의 묘, 박순집 일가 16위 순교자 현양비, 남종삼 성인의 흉상과 사적비 등이 마련돼 있기도 하다. 특히 순례자들은 부친, 형제, 삼촌, 고모, 형수, 조카, 장모, 이모에 이르기까지 한 집안 열여섯 명의 가족들이 한꺼번에 치명한 박순집(1830-1911년) 일가의 이야기가 새겨진 비석 앞에서 가슴 뭉클한 감동을 가눌 길이 없다. 절두산 성지에 모셔졌던 박순집 증거자의 유해는 2001년 인천교구 갑곶 성지로 이장되었다.
 
절두산 순교자 박물관 아래 설치된 순교 기념비.그리고 2000년 11월말에 절두산 순교 기념관과 꾸르실료 회관 사이에 이춘만 조각가의 웅장한 절두산 순교자 기념탑이 제작 설치되었다. '큰칼' 모양의 주탑과 절두(切頭)된 머리가 올려져 '절두탑'으로로 불리는 우측탑, 일종의 오벨리스크 형식으로 제작되어 수많은 무명 순교자를 조각해 넣은 좌측탑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주탑 하부에는 16명의 순교자를 새겨 넣었고, 우측탑 하부의 정면과 양면에는 신문 과정에서 배교했다가 마음 고쳐먹고 순교의 길을 간 신앙의 선조들을 표현했다. 좌측탑은 병인박해 과정에서 순교한 수많은 치명자들을 위한 '무명 순교탑'으로 박해의 과정에서 자신의 이름이 순교자로 드날리는 영예마저도 하느님께 봉헌하고 무명 순교자로 남은 치명자들을 기억하고자 했다.
 
절두산 순교성지는 한국 천주교회사를 대표하는 성지이나 인근 지역의 무분별한 개발과 변화로 인해 주변 환경이 급속도로 훼손되었다. 그래서 1997년 11월 교회의 노력과 정부의 지원으로 절두산 순교성지 일원을 '양화나루, 잠두봉 유적'의 명칭으로 사적 제399호로 지정했다. 지방 문화재로 지정된 성지는 있으나, 국가 사적으로 지정된 것은 오직 이곳뿐이다.
 
서소문 밖, 새남터, 당고개 등 큰 소리로 부르면 화답할 수 있는 순교지들은 도시의 소음에 묻히고 아파트 그늘에 가려 그 옛날의 아픔도 함께 가려진 듯하다. 하지만 유유히 흐르는 한강물과 같이 고요함 속에서도 우리에게 굵고 강한 목소리로 소리 높여 꿋꿋한 신앙을 가르친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2년 6월 18일)]
 

절두산 순교 기념비.

 
 
잠두봉과 절두산 사적지
 
현재 절두산 순교 기념관이 위치해 있는 곳은 양화나루(楊花津) 윗쪽의 '잠두봉'이다. 그 이름은 마치 누에가 머리를 들고 있는 것 같다는 데서 유래되었으며, 용두봉(龍頭峰) 또는 들머리(加乙頭)라고도 불리었다. 이곳 양화나루는 용산 쪽 노들 나루에서 시작된 아름다운 풍경이 밤섬을 돌아 누에 머리처럼 우뚝 솟은 이곳 절벽에 와 닿고, 이어 삼개 곧 마포 나루를 향해 내려가던 곳으로, '버드나무가 꽃처럼 아름답게 늘어진 곳'이었다. 특히 '양화나루에서 밟는 겨울 눈'에 대한 시는 한도십영(漢都十詠)의 하나로 손꼽힐 만큼 많은 문인과 명사들이 이러한 시를 남겼다. 이곳 잠두봉 명승지와 양화나루는 1997년 11월 11일에 사적지 제 399호로 지정되었다.
 
성지 마당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상.이처럼 아름답던 이곳이 순교자들의 피로 얼룩지게 된 것은 병인박해 때문이었다. 그 해 벽두부터 베르뇌 주교와 선교사들, 교회의 지도층 신자들을 처형하기 시작한 흥선 대원군은 이른바 병인양요(丙寅洋擾) 직후 이곳 총융진(總戎陣)에 형장을 설치하고 신자들을 체포해 학살하기 시작하였다. 앞서 1866년 9월 26일(음력 8월 18일)에 로즈(Roze)가 이끄는 세 척의 프랑스 함대는 한강 입구를 거쳐 양화나루와 서강(西江)까지 올라갔다가 중국 체푸로 돌아갔으며, 10월에는 다시 일곱 척의 군함을 이끌고 강화도 갑곶진(甲串津)을 거쳐 강화읍을 점령하였다가 문수산성과 정족산성에서 조선군에게 패하여 중국으로 철수하였다.
 
두 차례의 병인양요가 프랑스 측의 실패로 끝나면서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더욱 가열되어 1867년과 1868년 초까지 도처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거나 순교하였다. 대원군은 전국에 명하여 천주교도들을 남김없이 색출해 내도록 하였으며, 11월 23일에는 성연순 등을 체포하여 강화도에서 교수형에 처하고, '천주교 신자는 먼저 처형한 뒤에 보고하라'는 선참후계(先斬後啓)의 영을 내렸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 함대가 양화나루까지 침입한 것은 천주교 때문이고, 조선의 강역이 서양 오랑캐들에 의해 더럽혀졌다.'는 구실 아래 '양화나루를 천주교 신자들의 피로 깨끗이 씻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처음 이곳에서 순교한 신자들은 10월 22일에 효수형을 받은 이의송(프란치스코), 김이쁜 부부와 아들 이붕익, 10월 25일에 효수형을 받은 황해도 출신의 회장 박영래(요한) 등이었다. 그리고 이후로는 효수형뿐만 아니라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기도 하였으며, 또는 몽둥이로 쳐 죽이는 장살로, 얼굴에 한지를 붙이고 물을 뿌려 숨이 막혀 죽게 하는 백지사(白紙死, 일명 도모지) 등으로 계속하여 순교자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교회 안의 전승에 따르면, 순교자들의 피는 잠두봉 바위를 물들이면서 한강에 흩뿌려졌다고 한다.
 
절두산 순교자 박물관 모습. 왼쪽이 박물관, 오른쪽이 기념성당 입구이다."어떤 순교자는 죽은 뒤에도 얼굴 색이 변하지 않았고, 어느 순교자는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찾았으며, 또 어떤 순교자가 죽은 뒤에는 한강에서부터 무지개가 떴다. 그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안장한 신자는 곧 그들의 뒤를 따라 순교자가 되었으며, 이를 목격한 외교인은 무서운 박해의 위협 속에서도 주저하지 않고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순교자들의 씨는 복음의 터전이 되었고, 복음에 대한 믿음은 다시 순교자를 탄생시킨 것이다."(한국의 여러 '순교사기')
 
이때부터 이곳은 양화나루나 잠두봉 등 아름다운 이름으로 불려질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불려진 이름이 절두산(切頭山),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로 얼룩진 탓에 애달픈 의미가 더 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순교자들의 행렬은 이후로도 3-4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면서 절두산은 이제 한국 천주교회의 순교사 100년을 대변해 주는 곳으로 인식되었다. 이에 교회측에서는 순교자 현양 운동의 일환으로 1956년 5월 20일에 이 일대를 매입하였고, 6년 뒤에는 순교자 기념탑과 노천 제대를, 1967년에는 순교 기념 성당과 박물관을 건립하였다. 뿐만 아니라 명동 대성당 등 여러 곳에 안장되어 있는 순교 복자들의 유해를 옮겨다 안치하였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절두산이란 이름은 그렇게 순교자들의 혼과 넋을 담은 곳으로 우리에게 남겨지게 되었다. 또 순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으며, 순교자 현양 대화도 자주 열리는 곳이 되었다. 실제로 이곳에 있는 공경하올 순교자들의 유해, 한국 성인들이 남긴 유품과 유물 등은 복음의 가르침과 함께 다음 세대로 이어지게 될 것이고, 우리 신앙 후손들이나 그 자손들 또한 이를 통해 내면의 양식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럴수록 우리는 100여 년 전에 이곳에서 일상의 영욕을 버린 채 천국이라는 영원한 본향(本鄕)을 찾아간 그들의 신앙을 되새겨 보아야만 한다. [출처 : 차기진, 사목, 1999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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