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신비여
사제 생활 50년의 단상
왕영수 신부 지음
3. 치유의 시간, 치유의 은사
12 살인 충동과 사탄의 유혹
무려 열 시간에 걸쳐서 면담고해를 주고 나니 어느
새 밤 12시가 되었습니다. 자리에서 막 일어서려는데 중년부인이 면
담을 해야 한다고 막무가내로 딱 버티고(?) 앉았습니다. 많은 일들이
계획되어 있어서 새벽 6시에는 일어나야 하는 내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는 태도였습니다.
"신부님, 몇 년 동안을 기다려왔고 오늘 저녁에도 세 시간이나 기
다렸는데 오늘은 꼭 면담해야겠습니다. 제발 저를 보아주세요."
도대체 물러갈 기미가 보이지 않기에 "자매님, 옆방의 피정자들도
이미 잠이 들었고 나도 시간이 없으니 용건만 조용히 말씀하세요."
'요즘 심리 상태 같으면 차라리 자살이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그
부인은 살인의 충동과 강박증에 사로잡혀 있다는 놀라운 얘기를 꺼
내놓기 시작했습니다.
"저에게는 다섯 명의 자녀가 있는데 방이나 응접실에서 즐겁게 뛰
어놀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갑자기 망치로 머리를 때려죽이
고 싶은 생각이 납니다. 또 잠을 자다가도 옆에 누워 있는 남편의 흰
등을 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칼로 찔러 죽이고 싶은 충동을 느낍
니다. 내가 왜 이렇게 해야 하느냐는 심한 죄책감에 빠질 때도 있지
만 이런 섬뜩하고 끔찍한 감정이 전에는 한 달에 한 번, 요즘에는 일
주일에 한 번, 최근에는 하루에 한 번씩 일어납니다."
30분이 넘는 설명을 들으면서, 나는 '주님, 이 자매님의 문제가 해
결되어야 이 자리에서 물러갈 것 같고 나도 쉬어야 하는데 저에게 지
혜와 분별력을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중에 문득 '살인'이란 단어가 선명하게 떠올랐습
니다. 그래서 "자매님, 혹시 살인한 적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습니
다.
"예엣? 저한테는 살인을 할 만한 용기가 손톱만큼도 없습니다."
"그러면 유산을 시킨 적은 있습니가?"
"예. 지금 키우고 있는 아이들보다 두 배나 더 많이 유산을 시켰습
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유산을 잘한 것 같습니다. 아비가 서로 다른
자식들, 피부 색깔이 제각각인 애들이 한 집에서 한 형제로 성장한다
고 가정하면 참으로 끔찍하기만 합니다."
그 부인의 사정은 그럴지 몰라도 나는 유산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확실하게 강조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살인 행위로, 친모살인이며 큰 죄에 속합니다. 얼
마전에 전 세계에 천명한 교황님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분명한 살인
이고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약간의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수태부터가 하나의 인간 생명체이고 낙태당할 때 그 어린 생명이
죽어가면서 겪는 고통, 자기 어머니로부터 죽임을 당하는 슬픔을 생
각해보아야 합니다. 그 아기들이 얼마나 비참하게 죽어갔겠습니까?"
그분은 갑자기 얼굴이 붉어지면서 계속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엔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무엇이 이 분에게 낙태를 부추기고 죄가 아니라고 합리화했습니
까? 지난날 낙태를 했던 죄와 그 아픔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살인하
려는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정체는 무엇이며, 스스로를 자살로 유인
하고 있는 그 정체는 또 무엇인지, 성령께서는 저에게 알려주시고 해
결할 능력을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던 내 머릿속에 갑자기 '사탄'이라는 단어가 강하게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구마기도를 했습니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이 여인에게 과거의 상처와 죄의식
을 부추겨서 살인 의지를 심어주고 살인하도록 충동하는 더러운 악
령아! 나자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한다. 물러가라.'
부인을 또바로 바라보면서 속으로 기도했습니다. 그 부인은 몰랐
지만 사탄은 당장 반응했습니다.
"안 된다 안돼! 절대로 물러갈 수 없다."
그 부인은 험악한 얼굴로 심한 몸짓까지 하면서 눈을 부릅뜨고 볼
근육을 씰룩거리며 갑자기 험악한 표정으로 돌변했습니다.
나는 이번에는 큰 소리로 아주 강하게 구마기도를 했습니다.
"내가 이제 네 정체를 알겠다. 다시 한 번 명령한다. 나자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당장 이 여인에게서 물러가라!"
그 순간 부인은 걸상에서 바닥으로 떨어졌고 거품을 내면서 몇 분
동안 바닥에서 심하게 요동쳤습니다. 나는 이어서 사죄경을 해주고
사탄이 자리했던 곳에 주님의 사랑이 자리 잡도록 축복의 기도를 하
고 나서 시간이 늦었으니 이제 그만 가서 편히 주무시라고 했습니다.
"신부님이 구마기도를 했을 때 내 몸에서 강한 기운이 빠져 나가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왠지 혼자 자기가 무섭습니다. 신
부님 앞에 있는 십자가를 주시면 안고 자고 싶습니다."
그 다음날 식당에서 만난 부인의 얼굴은 몰라볼 정도로 환하게 변
해 있었습니다. 부인은 감사미사를 드리고 성령의 축복과 안수를 받
고 기쁜 마음으로 자신이 살고 있는 미시시피 중부지방의 작은 마을
로 돌아갔습니다. 일주일 후에 그 부인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신부님, 감사합니다. 지금은 평화롭게 잘 살고 있습니다. 더 기쁜
것은 척추의 디스크 때문에 수술을 받아야 했었는데, 의사의 진단소
견은 이미 치유가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수술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었습니다.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자매님, 주님께 감사하시고 그 주님의 사랑을 마음 깊이 간직하시
고 이제는 열매 맺는 데 힘써야 합니다. 저보다 주님께 감사하면서
기쁘게 사십시오."
주님의 평화가 항시 함께 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