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졸작 <창작수필이론>이라는 것을 내어 놓게 된 까닭은 에세이를 창작문예수필(창작문학-이하 동문)보다 못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에세이의 잃어버린 가치를 되찾아오기 위해서였다. 에세이와 창작수필의 다른 점은 서로의 발전적 지향을 위한 목적에서 논의 되어야 할 문제이지 그 가치의 우열이라는 점에서 다루어질 문제가 아니다. 산문문학(에세이)과 창작문학(창작문예수필)은 각기 그 독자적이고 고유한 가치를 가지고 있을 뿐 서로 비교 대상이 되지 않는다. 만약 사람이 생존하기 위해서 공기의 가치가 더 중요하냐 물의 가치가 더 중요하냐고 묻는다면 그 얼마나 어리석은 발상이겠는가. 이 같은 점은 에세이와 창작수필의 관계뿐 아니라 예술 장르 전반이 같은 관점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상식이다. 누가 그림의 가치가 음악의 가치보다 월등하다느니 못하다느니 하는 식의 논쟁을 한단 말인가? 이 땅에 서양의 에세이 문학이 들어 온 후 에세이가 에세이로 발전하지 못하고 자생적 '문예수필'이라는 이름을 얻으며 창작문학 쪽을 지향하며 발전하여 왔다는 사실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그러나 현대 수필 1세기를 헤아리게 된 작금의 수필계에는 에세이도 아니고 창작수필도 아닌 정체불명의 소위 '신변잡기' 혹은 '잡문'이라는 세평을 받는 글들이 양산되는 현실을 맞게 되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에세이문학은 에세이문학대로 그 학문적 맥을 잃어버린 데에 있고, 문예수필은 문예수필대로 그 창작성에 관한 학문적 뒷받침을 얻지 못한 데에 있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내가 나의 남은 생애를 에세이를 쓰는 일을 위해서 바쳐도 좋다고 생각하고 에세이스트가 되어 문단 활동을 시작한 후 내 주위를 둘러보니 뜻밖에도 에세이를 쓰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나는 에세이스트로 문단에 등단하기 전에 우리 나라에는 7,8십년 대 이후 에세이(수필)인구가 폭발적으로 팽창하고 있다는 말을 수 없이 많이 전해 들었었다(필자는 재미在美 30년의 인생 경력을 가지고 있음). 그런데 그 많다던 에세이스트가 다 어디로 갔기에 주위에 에세이스트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단 말인가? 물론 서양의 에세이가 우리나라에 들어 온 후 자생적 '문예수필'이라는 것으로 변모하여 성장해 오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창작문예수필은 아직도 형성 단계에 있으므로 당연히 작가들이 에세이 작품을 즐겨 쓰는 한편 창작수필을 시도 하고 있을 것으로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 원인을 알아보기 위해서 이 책 저 책 손에 닿는 대로 찾아보니 그 원인이 다른 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바로 설계도(이론)가 없는 <창작수필>이라는 집을 짓고 있었기 때문임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소설이라는 집에도, 시(詩)라는 집에도 아주 오래 동안 손질에 손질을 거쳐서 만들어진 단단한 설계도가 있다. 그래서 상수도 물이 새거나 전기 고장이 나면 먼저 설계도부터 펼쳐 놓고 상수도 배선이나 전기 배선을 찾아 들어가서 고장 난 부분은 고치기도 하고, 혹은 보다 나은 새로운 설치를 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다. 집에 대한 평가 작업을 하는 평론가들은 그 같은 설계도에 근거해서 이것은 이래서 이렇다 하고, 저것은 저래서 저렇다 라고 평가 작업을 한다. 그 같은 작업을 통해서 소설과 시 문학은 날로 발전해 가고 있다. 그러나 <창작 수필>이라는 집에는 그런 설계도(창작이론)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누가 어떤 돌멩이나 작대기나 못 한 개라도 가져와서 '손(붓) 가는 대로' 아무 방법이나 '형식도 없이' 그야말로 '시험적으로' 쌓던지 세우든지 말하는 사람이 없는 것이었다. 무엇이라고 말을 할 근거(설계도)가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집에 대한 평가 작업을 한다는 사람들도 수필이라는 집의 설계도(이론)가 아닌 남의 집, 즉 시문학이나 소설 문학 혹은 문학 일반에 관한 설계도를 끌어다가 수필작품을 평가하는 웃지 못할 부끄러운 일들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문예수필>이라는 집이 세간으로부터 '신변잡기' 혹은 '잡문'의 집이라는 비난을 받게 된 것은 오히려 당연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나는 그래서 한 사람의 무명 작가에 지나지 않는 사람이지만 감히 <창작수필 이론>이라는 것을 만들게 되었던 것이다. 그 용도는 말 할 것도 없이 다른 사람 아닌 내 목이 타 들어가서 내가 먼저 이 물을 마시기 위해서였다. 나는 에세이 쓰는 일을 위해서 나의 남은 생애를 바쳐도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인데 내가 쓴다는 에세이라는 집의 설계도와 문예수필이라는 것의 다른 점이 무엇이냐를 말 할 수 있는 학문적 근거가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 수필문단 전반에서 양산되고 있는 에세이(산문문학)도 아니고 창작문학도 아닌 소위 '신변잡기'나 '잡문'들이 왜 에세이도 아니고 창작문학도 아닌 '신변잡기'이며 '잡문' 인지를 학문적으로 분별 할 수 있어야 된다는 필요에 직면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에세이라는 집에는 일지기 서양에서 들어 온 설계도(산문문학 이론)가 엄연히 있었다. 물론 그것마저도 자생적인 변종의 이론 아닌 이론인 '붓 가는 대로'라는 말에 가리워 햇빛을 보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없는 것은 아니어서 에세이 이론 까지 쓸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내가 먼저 숨통 트고 살아남기 위해서 졸작 <창작수필이론>이라는 것을 내어 놓게 된 것이다.
이 말은 내가 이 글을 쓰고 있을 때 마침 내 손이 닿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인용하게 된 말이다. 다시 말하면 내가 나의 이 글에서 말하고 있는 바를 세우기 위해서 일부러 찾아서 인용하게 된 글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만큼 문학연구의 목적에 관한 해명은 상식처럼 손 가까이에 밝혀져 있다는 뜻이다. 즉 문학을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분석하는 일이 없으면 내가 지적하고 있는 소위 저 에세이도 아니고 창작문학도 아닌 글들이 왜 '신변잡기'이며 '잡문'인지를 분별 할 길이 없다는 뜻이다. 글이란 무서운 것이다. 칼보다 무서운 것이다. 내가 쓴 한마디 글 귀 때문에 한 영혼이 죽을 수도 있고 살 수도 있다. 이제 수필문학은 더 이상 '여기의 문학'으로 '붓 가는 대로' 쓸 수 있는 글이 아니다. 두 눈 똑바로 뜨고 써도 될까말까 한 전문가의 문학이다. 수필문학이 전문성을 갖추려면 서양에서 들어 온 에세이의 정체성은 그것대로 살려야 되고 우리 나라의 자생적 문예수필은 그것대로 학문적 뒷받침을 해 주어야 된다. 서양의 에세이문학의 높은 가치는 지구촌 전체가 탄복하고 있는 바 그대로다. 아직도 현대의 고전처럼 여김을 받고 있고, 특별히 우리나라 수필문학 이론서에서는 절대로(?) 빠트리지 않고 거론하고 있는 몽테뉴가 그렇지 않느냐? 그런데 놀랍게도 몽테뉴가 실제적인 푸대접을 받고 있는 곳이 지구촌에서 어디인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에세이도 아니고 창작도 아닌 글들을 학문적으로 방치 해 두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전문성의 결여는 다른 데서 오지 않는다. 공부하지 않는 데서 온다. 수필작가(혹은 에세이스트)라는 우리 모두가 '무엇을 가지고 에세이라 하며, 또 무엇을 가지고 창작수필이라고 하느냐?'는 질문에 학문적인 대답을 내어 놓지 못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는 더 이상 '신변잡기'라느니 '잡문'이니 하는 비난을 받을 수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에세이는 에세이대로 세워주고, 창작문예수필은 그것대로 학문적 근거를 만들어 주어야 된다. 이것이 오늘 이 시대 우리에게 맡겨진 문학적 과제다. 우리는 우리의 후손들에게까지 '신변잡기' 소리를 듣게 해서는 안 된다. @ 李寬熙 서라벌예대 수학
출처: e-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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