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신비여
사제 생활 50년의 단상
왕영수 신부 지음
3. 치유의 시간, 치유의 은사
04 치유(2) - '예수 믿는 놈'
신시내티 대학의 한 유명한 한인 경제학 교수의 부
인에게서 전화를 받았습니다. 1983년에서 1984년 무렵 신시내티에
있을 때였습니다.
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남편을 위해 가정 방문을 해달라
는 전화였는데, 나는 당장은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나는 "앞으로 5일 후 토요일 오전에 방문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고 내가 갈 수 있는 날을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부인은 아주 시
큰둥하게 전화를 끊었습니다. 사실 나는 그 교수의 병에 대해 들은 적
이 있었고, 개신교 신자들이 방문해서 모욕감을 느끼고 돌아갔다는
소문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이튿날 부인한테서 다시 전화가 왔습니다. 좀 더 빨리 와달라는 부
탁이었는데 나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약속한 날 하루 전에 세 번째
전화가 왔지만 공손하고 냉정하게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토요일 오전
10시께 본당의 홍 디미아노 회장님과 김 데레사 봉사자와 함께 그 집
을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환자의 건강에 대한 의사의 진단 내용과 현재 환자의
심정을 물으면서 대화를 한 후 기도를 하려고 하자 환자가 '예수의 이
름으로 기도하지 말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개신교 장로님들이
왔을 때도 기도하지 못하게 했노라고 했습니다.
"혹시 예수에 대해 무슨 좋지 못한 일이나 상처받은 일이 있었습니
까?"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더니 그는 지난 얘기를 들려주었습니다.
1950년대 말 뉴욕에서의 유학생 시절, 현재의 부인을 만나 결혼하
기 위해 화려한 예배당을 찾아 미국 목사님과 상담을 했는데 결혼식
비용으로 200달러를 요구했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에게는 50달러도
큰돈이라고 사정을 해보았지만 결국 거절당했습니다(당시 50센트면
간단한 점심식사를 할 수 있는 금액).
두 사람은 결혼식도 올리지 못한 채 법원의 민원 기계 안에 5달러
를 넣고 혼인증명서를 받았습니다. 그때부터 '예수 믿는 놈'에 대한
증오가 가슴에서 지워지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사람보다 돈을 더 좋아하는 목회자들, 그들이 입에 달고 다니는
'예수'란 말은 가증스러움과 위선의 대명사로 들렸습니다."
나는 속으로 기도했습니다.
'이 사람에게 당신의 이름으로 상처를 주신 예수님, 결자해지(結者
解之)라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그 상처를 없애주십시오.'
그리고 우리 기독교인들의 잘못을 용서해달라고 소리 내어 기도하
면서 이 같은 참사랑을 나누도록 기회를 주신 하느님을 찬미했습니다.
우리는 성서를 읽고 성가를 부르고 그런 다음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
하신다.' 는 내용의 성서구절을 10개 정도 주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후 그 집을 찾았을 때 놀랄 만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성서를 읽었고 그 말씀을 마치 솜이 물을 빨아들이듯이 아주
쉽고 깊게 소화하고 있었습니다. 또 '하느님이 정말로 우리를 사랑하
신다.'고 '그 사랑을 내가 느끼고 있다.'고 그가 고백하는 것이 아닙
니까?
놀랄 만한 일은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신부님이 지난번 저희 집에 다녀가신 다음날 누군가 대문 앞에 암
에 좋다는 자연식품과 편지를 두고 갔습니다. 알고 보니 국제결혼한
가난한 여자였습니다. 그 편지를 읽고 저는 너무나 많이 울었습니다.
저 같은 놈을 이국땅에서 자랑스럽게 여기며 내 병이 빨리 낫기를 간
절히 기도한다면서 축복의 말과 함께 건강식품을 몰래 두고 갔다는
사실이 너무나 고맙고 그분의 정성과 동족 간의 우정에---."
그는 한참을 말을 잇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몰래 사랑을
전하고 간 여인의 편지가 성서와 함께 그의 마음을 크게 울렸던 것입
니다.
"신부님, 저는 죄인입니다. 몇 십 년 동안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도 나는 한 번도 학생들이나 제자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제 두 아들, 그리고 옆에 있는 아내까지 진정으로 사랑해본 적
이 없었습니다."
그는 사랑을 모르고 살았다고 했습니다. 훌륭한 부모 밑에서 사랑
을 받지 못하고 자란 탓에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사랑
을 주어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가 사랑을 몰랐
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큰 죄인이라고 했
습니다. 그리고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른 채 마음의 문을 닫
고 살았던 자기 인생은 너무나 형식적인 생활이었으며 실패한 인생이
었다고 했습니다.
나는 그가 하느님께로 깊이 돌아가고 있고 자신의 참모습을 찾아가
는 것을 보고 정말 감사했습니다. 우리는 함께 치유기도와 축복의 기
도를 했습니다.
세 번째 방문 후 본당 회장님에게 '4대교리'를 설명해드리도록 했
고 한 달 후에 세례성사를 주었습니다. 곧이어 견진성사, 한 주 후에
병자성사, 그리고 교회가 할 수 있는 모든 성사를 다 해드렸습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는 그가 죽음에 대해 아주 태연하게 초월하는 자세
와 평온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3개월 후 그분은 선종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장례식은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의 축제였습니다. 슬픔이 죽음이 아닌 영광의 부활을 위
한 죽음이었습니다. 그가 파스카의 신비,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영원
히 사는 부활의 영광을 누리는 상태가 된 것을 우리는 느꼈습니다.
"인생의 마지막이 이렇게도 사람들에게 평화와 희망을 안겨줄 수 있
을까?"
이런 장례식은 처음이라고 200여 분의 문상객들이 이구동성으로 입
을 모았습니다.
아름다운 공원묘지에서 내가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는 예수님을 묵상
하며 "거룩한 죽음은 가장 강력한 복음 선포."라고 중얼거리고 있는
동안 그분의 시신은 어느새 하관예절을 마치고 땅에 묻히고 있었습니
다.
주님의 평화가 항시 함께 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