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신비여
사제 생활 50년의 단상
왕영수 신부 지음
3. 치유의 시간, 치유의 은사
09 넷째 딸의 분노
"신부님, 저는 제 마음속에 딸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것을 뒤늦게 발견하고 많이 놀랐습니다. 그래서 딸의 장점보다
는 단점을 먼저 보고 사랑의 매가 아니라 분노의 마음으로 딸을 때린
적이 많았습니다. 신부님, 제게는 아주 심각한 문제입니다. 요사이는
삶의 의욕도 없고 우울증 증세까지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도와주십
시오."
"자매님의 형제들은 몇 분이며 몇 째입니까?"
"딸, 딸, 딸! 그리고 딸이니까 제가 바로 넷째입니다."
평소 활달한 자매님은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나는 놀랐습니다. 약간 악을 써가면서 자기가 넷째라고 말하는 억
양이나 태도, 특히 그 눈빛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딸로 태어났기 때문에 혹시 상처를 받거나 성장 과정에서 부모나
할머니에게 사랑받지 못한 것은 없었나요?"
"그런 적이 없고 아버지께서는 저를 특별히 사랑해준 것 같았습니
다."
"그러면 다섯 번째 낳은 아들에게 부모님이나 다른 분들의 관심이
쏠리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또 남동생하고 관계는 어떠한지요?"
"아주 기분 나쁜 정도가 아니라 분노를 일으킬 정도로, 동생이 원
하면 90퍼센트는 다 해주는 것을 보고 화를 낸 적이 많았습니다. 부
모님이 안 계실 때는 얄미운 남동생을 때리고 못살게 굴었던 기억도
있고 지금도 생리적으로 싫은 감정이 많습니다."
"자매님, 자매님의 출생은 부모를 비롯한 가족의 희망을 저버린
사건이었고 환영받는 삶의 시작이 아니었습니다. 남아선호사상 때
문에 자매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가족들에게 아픔과 실망을 주는 존
재로 삶이 시작됐습니다. 그러다 자매님 다음에 태어난 아들에게로
관심과 사랑이 자연스럽게 집중되었으니, 자매님도 스스로 살아남
기 위해서 온갖 악을 써가며 홀로서기를 한 것입니다. 딸로 사는 인
생 자체가 얼마나 슬픈 것인지를 알면서 여자로서 고단한 삶을 겪어
왔으니, 자매님의 딸에 대한 생각이 처음부터 부정적으로 기울어졌
던 것입니다. 사업을 활발하게 하다가도 심각한 침체에 빠지고 거기
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한 큰 이유가 부모의 사랑이 부족했기 때문
입니다. 그간 남모르게 고달픈 삶을 용케도 극복하고 잘 살아왔습니
다."
이 말을 듣는 자매님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고 어느새 눈에서 눈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사랑이신 하느님, 사랑이 결핍된 이 영혼을 당신 사랑으로 포근히
감싸주십시오.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받은 사랑의 상처가 가득합니
다. 딸이라는 이유 때문에 살뜰한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마음으로부
터 깊은 상처를 받았던 응어리를 풀어주시고 깨끗하게 하여 주십시
오."
이어서 치유를 위한 심령기도를 4분 정도 했습니다.
"다시 한 번 이 자매님이 축복받은 인생이라는 것을, 자기 자신이
얼마나 소중하고 고귀한 존재라는 것을, 하느님의 큰 사랑으로 창조
되었다는 것을 깊이 깨우치고 확신을 갖고 살아가도록 거룩한 성령
으로 축복해주십시오. 상처와 응어리진 그곳에 기쁨과 평화를 심어
주시고 사랑을 부어주시어 생동하는 삶을 살게 해주시옵소서. 예수
님,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랑의 성혈로 이 자매님을 깨끗하게 해주
시고 은혜롭게 해주실 것을 믿습니다. 당신은 세세 영원히 생활하시
고 다스리시나이다."
한 달 후에 만난 자매님은 평온한 가운데 기쁘게 살면서 행동과 말
도 나이에 맞게 차분하면서도 생기가 돌고 있었습니다.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가는
옛 인간을 벗어버리고,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
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에페 4,22-24)
주님의 평화가 항시 함께 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