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9월 20일 전라북도 기념물 제68호로 지정된 치명자산 유항검 일가 합장묘에는 호남의 첫 사도요 순교자였던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와 그의 부인 신희(申喜), 둘째 아들 유문석(柳文碩) 요한과 조카 유중성(柳重誠) 마태오, 제수 이육희(李六喜) 그리고 동정부부로 유명한 유중철(柳重哲) 요한과 이순이(李順伊) 루갈다 등 7명의 순교자 유해가 모셔져 있다.
이들은 원래 치명한 후 김제군 재남리(현 전주시 덕진구 남정동)에 가매장됐다가 전동 본당 초대 신부인 보두네(Baudounet) 신부를 비롯한 신자들이 1914년 4월 19일에 이곳으로 옮겨 모셨다. 이어 1949년 전동 성당 신자들은 치명자산에 십자가 기념비를 세웠다. 1993년 11월 29일 이 묘소를 개장한 후 유해 확인 작업을 벌인 결과, 이 가족 묘소에는 7개의 옹기에 각각 유해가 담겨져 있었으며, 백사발에 인적 사항이 적혀 있었고, 숯을 담은 채 옹기를 막아 놓아 보존 상태가 비교적 양호했다.
1801년 신유박해가 터지자 전라도 지방에서 제일 먼저 체포돼 서울로 압송당한 유항검은 대역부도(大逆不道) 죄로 능지처참형을 받고 전주 감영으로 다시 이송, 1801년 10월 24일 남문 밖에서 46세의 나이로 참수되었다. 동생 유관검에 이어 11월 14일 두 아들 유중철과 유문석 그리고 다음해 1월 31일 부인 신희와 며느리 이순이, 조카 유중성과 제수 이육희가 순교했다.
이렇게 해서 유항검 일가는 지상의 모든 삶을 영생의 세계로 옮겼고 이들의 하느님께 대한 순종과 믿음의 확신은 일가의 단종을 가져왔다. 조정은 이들의 흔적을 아예 없앨 요량으로 대역죄인의 집을 헐고 집터를 깊게 파 연못을 만들어 버리는 ‘파가저택’(破家瀦宅)의 형을 내렸다.
치명자산 성지 성역화 작업은 1987년 전주교구 설정 50주년을 앞두고 처음 시작되어 1985년 성직자 묘지를 조성하고 1988년 십자가의 길과 산행로 정비작업을 완료했으며, 1994년 5월 9일 산 정상 순교자들의 합장묘 아래에 기념성당을 봉헌했다. 1997년 입구 조경을 위한 몽마르트 광장을 조성하고 이어 주차장과 진입로 등을 차례로 진행했다. 또한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가장 빛나는 진주로 불리는 유중철과 이순이 동정부부를 현양하는 요한 루갈다제를 2001년부터 매년 개최하여 순교자 현양행사를 지역문화 축제로 승화시키고 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1년 11월 14일)]
전주 숲정이와 치명자산
'전주 숲정이'(전주시 진북동 1034-1번지)는 조선 시대 군사들이 무술을 연마하던 장소로, 일찍부터 중죄인들의 형장으로 사용되어 오고 있었다. 그러다가 박해가 시작되면서 이곳은 천주교 신자들의 순교 터로 변모하였다. 1801년에 이순이와 류항검의 가족이 순교한 이후 1839년 기해박해 때는 충청도 출신의 김대권(베드로), 이태권(베드로), 이일언(욥), 정태봉(바오로)과 경기도 출신의 신태보(베드로) 등 5명이 5월 29일 이곳에서 순교하였다. 또 1866년 병인박해 때는 정문호(바르톨로메오), 손선지(베드로), 한재권(요셉), 조화서(베드로), 이명서(베드로), 정원지(베드로) 등 6명이 12월 13일 이곳에서 순교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1984년 5월 6일 성인품에 올랐다.
이 숲정이 형장이 교회 사적지로 조성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초에 이명서 성인의 손자 이준명(아나돌)이 숲정이 순교 터를 매입하면서였다. 이후 1935년에는 전동 본당의 이학수(바오로) 회장이 그 자리에 십자가비를 건립하였으며, 1960년에는 이곳 이웃에서 해성 중고등학교가 개교하였고, 1968년에는 순교 복자 현양탑이 건립되었다. 또 1984년에는 숲정이 순교 터가 지방 기념물 71호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도시화의 물결로 1989년에 해성학교가 이전되고 아파트가 건립되면서 본래의 순교 터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지금은 본래의 장소에서 150m 정도 떨어진 아파트 단지 내(진북동 1034-13번지)에 새로 사적지가 조성되어 있다. 이곳에 가기 위해서는 전주시로 들어와 전주천 변에 있는 진북 초등학교를 찾으면 된다.
한편 류항검과 가족들이 순교한 뒤 남아 있는 노비와 인척들은 그들의 시신을 거두어 초남리 너머에 있는 재남리(김제군 이서면과 용지면의 경계 마을) 바우배기에 합장하였다. 그 후 전동 본당이 설립되면서 재남리 공소는 이 본당 관할이 되었으며, 초대 본당 주임 보두네 신부는 자주 이 공소를 순방하는 도중에 바우배기의 류항검 가족 무덤을 돌보았다. 그러던 중 1914년 사순 시기에 땅 주인이 무덤을 이장하도록 권고하자, 보두네 신부는 신자들과 함께 그곳으로 가서 파묘를 하여 순교자 7구의 유해와 이름이 적힌 사기 접시를 확인하게 되었다. 류항검과 부인 신희, 아들 문석과 조카 중성, 제수 이육희, 그리고 동정부부 류중철과 이순이였다.
지금까지 이곳 사적지에서는 크고 작은 기적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앞으로 그것은 하느님의 종으로 선발된 류항검, 류중철, 이순이 등의 시복 과정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고, 이곳을 찾는 순례자들에게도 커다란 감동을 주게 될 것이다. 석양이 질 때 드러나는 이곳 언덕의 기념 십자가 옆에 있는 바위는 순교자들을 바라보고 있는 성모 마리아 상과 비슷하다. 이처럼 치명자산은 더 많은 양들을 진리의 길로 이끌어 주기 위해 오늘도 전주 시가지를 내려다보고 그곳에 서 있다. [차기진, 사목, 1999년 11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