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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춘녀가 없었던 발해

사랑의 기쁨 2012. 10. 16. 14:19

매춘녀가 없었던 발해

직업 중 역사가 가장 오래된 것 중의 하나가 매춘업이다. 남성중심의 역사가 그만큼 오래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시공간을 막론하고 매춘은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매춘의 역사에도 예외가 있다. 발해의 경우가 그렇다.

발해의 여권은 상당히 강했다. 일부일처제가 일찍이 확립되어, 발해의 남자들은 인근의 신라나 중국의 귀족들은 물론이고 일반인들도 많이 거느렸던 첩을 제대로 둘 수 없었다.

남송시대의 문헌인 [송막기문]을 보면, 발해에서는 첩을 두었다하더라도, 남편이 외출하면 부인들이 공모해 그 첩을 독살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다. 일부일처제가 확고해서인지 발해의 무덤에는 부부합장묘가 많다고 한다. 첩을 둘 수 없었던 발해의 남자는 바깥에 나가서도 딴 짓을 할 수 없었다. 신라와 중국은 물론이고, 주변 부족인 거란이나 여진족에도 있었던 홍등가, 창녀 등이 없었다. 발해가 계승한 고구려에도 창녀의 일종인 유녀(遊女)가 있었는데 말이다.

중국 동북부지방에는 ‘홍라녀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홍라녀라는 발해 여인이 장군이 되어 거란과 싸움에 나가 이긴 뒤 남편을 구해 돌아왔다는 전설이다. 집안에서만 강한 게 아니라 실제 전투를 수행할 정도로 씩씩한 발해의 여성이었다.

그래서인지 발해에서는 절을 할 때도 남자는 무릎을 꿇고 하는데, 여자는 무릎을 꿇지 않았다고 한다. 이 정도면 우리 역사에서 여권이 가장 강력했던 나라로 발해를 꼽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