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사장 |
정말 신이 존재한다면 어떤 신인지 궁금합니다. 박 교수님이 말씀하셨듯이 신이 만물의 원인이었다면 신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다시 말해서 신은 누가 만들었지요? '저절로'는 없다고 했는데 신은 저절로 태어났습니까? |
박교수 |
좋은 질문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신은 '스스로 존재하는 분'인데, 철학적인 표현으로 '자존자(自存者)' 라고 합니다. |
최사장 |
못 알아듣겠는데요! |
박교수 |
그렇지요. 쉽게 설명을 해 보겠습니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결과는 신이 원인이 되었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주 만물을 만드신 그 분은 만들어지지 않고 스스로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
최사장 |
교수님이 조금 전에 스스로는 안 된다고 하셨는데요? |
박교수 |
스스로'와 '저절로'는 구분되어야 합니다. 인과율을 무시하는 듯한 '저절로' 가 아니고 자기 '스스로' 능력과 힘을 가진 것으로 구분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원인과 결과가 계속 무한히 연결될 수는 없습니다. 마지막에 모든 것을 있게 한 원인은 자기 스스로 존재해야 합니다. 모든 존재의 최초 발단은 만들어질 수 없습니다. 기차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객차 열 량이 끌려갑니다. 제일 뒤에 있는 객차는 앞 객차에 의해서 끌려가지요. 끝에서 두 번째 객차는 어떻게 갑니까? |
최사장 |
끝에서 세 번째 객차에 끌려가지요. |
박교수 |
그렇습니다. 이렇게 해서 모든 객차는 앞 객차에 의해서 끌려가는데, 맨 앞에 있는 기관차는 어디에 끌려갑니까? |
최사장 |
그것은 스스로 엔진의 힘으로 가지요. |
박교수 |
그렇습니다. 신은 바로 전 우주를 이끌어가는 마지막 엔진입니다. '기관차가 아무 객차에도 붙지 않고 어떻게 가는가?' 하는 의문을 가진 사람은 그 기관차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이지요. |
최사장 |
그렇지요. 그것은 스스로 힘을 내어서 많은 객차를 끌고 가니까 말입니다. |
박교수 |
바로 그런 원리입니다. 우주와 모든 것은 신으로부터 나왔고 그 신은 우주 만상을 끌고 간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기관차가 스스로 자신의 힘으로 많은 객차를 끌고 가듯이 신은 스스로 존재하면서 모든 만물에게 존재를 준 것입니다. |
최사장 |
좀 어려운 이야기인데 약간 이해는 가는 것 같습니다. 상당히 철학적이네요. |
박교수 |
그렇습니다. 신의 존재 자체가 초월적인 것이기에 생각을 깊이 해야 합니다. 하나 더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니까 서울 장안에 이상한 이야기가 떠돌았어요. "지리산에 어떤 도사가 나타났는데 그 사람은 죽은 지 한 달 되는 사람을 모두 살릴 수 있대요." |
최사장 |
허무맹랑한 소리네요. |
박교수 |
그렇지요. 이런 거짓말이 서을 장안에 퍼졌습니다. 자! 어떤 친구에게 그런 말을 들었다고 합시다. 그래서 그 친구에게 "너 그런 소리를 누구한테서 들었느냐?"고 물으면 "사무실에서 같이 일하는 김모씨한테 들었다" 하고, 그 다음 사무실 김모씨를 찾아서 "당신은 누구한테서 그런 말을 들었습니까?" 하면 그는 대답할 것입니다. "우리 이웃집 아줌마한테 들었지요." 그 다음 이웃집 아줌마를 찾아가서 "아줌마는 그런 소문을 누구한테서 들었습니까?" 하면 그 아줌마는 또 다른 사람을 댈 것입니다. 이렇게 계속 추적을 하면 누가 나올 것 같습니까? |
최사장 |
계속 연결하면 마지막에는 그런 거짓말을 한 사람이 나오겠지요. |
박교수 |
바로 그렇습니다. 그 말을 발설한 사람이 없이 계속 영원히 추적될 수는 없습니다. 마지막에는 그 말을 한 원인이 있어야 합니다. 우주의 모든 존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저기서 나왔고 저것은 또 저기에서 나왔고 계속 따라 올라가면 모든 것의 원인이 밝혀집니다. 이것이 곧 '신'입니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신을 '자존자' 또는 '존재 자체'라고 합니다. 그래서 신은 영원한 존재자이고 '필연유(必然有)'라고도 합니다.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어려운 진리가 아닙니다. |
최사장 |
역시 박사 교수님이시네요. 어떻게 그런 공부까지 하셨습니까? 저는 이런 이야기를 오늘 처음 들어 봅니다. 신은 분명히 있어야 되고 그리고 신이 있어야 우주의 모든 질서가 유지되는 것 같습니다. |
박교수 |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시작이 있고 끝이 있듯이 우주의 시작과 끝도 있어야 합니다. |
최사장 |
좋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신과 우주의 관계라고 할까 ... 구체적으로 그 분이 우주를 어떻게 다스리고 있습니까? |
박교수 |
신은 이 우주의 모든 질서를 주신 분이고, 그 질서에 따라 우주를 통치하고 있습니다. |
최사장 |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세요. |
박교수 |
지구는 자전하면서 공전하고 있지요. |
최사장 |
그것은 기본적인 과학 상식이 아닙니까? |
박교수 |
하루가 정확히 24시간, 일 년이 365일이고, 뚜렷한 사계절이 있는 것이 바로 그 분의 능력이요 다스림입니다. 봄이면 꽃이 피고 가을이면 단풍이 들며, 동물들이 움직이는 이 모든 질서의 주관자가 곧 신입니다. |
최사장 |
신이 없다면 또는 신의 능력이 없다면 이 자연은 질서가 없다는 말이네요. |
박교수 |
그렇습니다. 철학자들은 '신은 질서의 설정자요 질서를 주관하시는 분' 이라고 합니다. |
최사장 |
신이 만든 질서에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박교수 |
질서는 자연 질서와 윤리 질서, 형이상학적인 질서가 있습니다. |
최사장 |
자연 질서와 윤리 질서는 알 듯한데 형이상학적인 질서는 무엇입니까? |
박교수 |
그것은 철학적인 내용이니까 몰라도 괜찮으니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말씀드리지요. |
최사장 |
그럼 신은 자연 질서와 윤리 질서를 주신 분이고 그것을 주관하시는 분이란 뜻이군요. |
박교수 |
그렇습니다. |
최사장 |
그런데 신이 만든 자연 질서에는 문제가 많은 것 같습니다. |
박교수 |
어떤 문제가요? |
최사장 |
자연 질서는 변덕이 심해요. 어떤 때는 홍수가 났다가 어떤 때는 가뭄이 들었다가 또 난데없이 태풍이 와서 농작물을 못쓰게 하고 말입니다. 뭔가 신이 잘못 만든 것이 아닙니까?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인간이 지켜야 하는 윤리 질서가 있는데 왜 세상은 이렇게 엉망입니까? 살인, 강도, 자살, 사기, 절도 ... 신이 있고 오늘도 이 질서를 주관하고 있다면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까? |
박교수 |
좋은 질문입니다. 우선 중요한 결론부터 내린다면, 오늘날 이 우주와 인간은 본래 신이 창조한 이상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중간에 인간의 죄'가 덮쳐서 자연과 인간 사회에는 큰 금이 갔습니다. 이 죄를 우리 그리스도교에서는 '원죄(原罪)'라고 합니다. 원죄로 말미암아 자연 질서와 인간 윤리 질서는 온전한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그만 금이 갔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부조리와 모든 윤리적인 죄악과 불행이 온 것입니다. |
최사장 |
원죄요? |
박교수 |
원죄에 대해서는 그리스도교 입문에서 공부하기로 하고 간단히 말씀 드리면, 원죄는 신과 인간 사이의 생명의 관계, 사랑의 관계를 끊어 버린 불상사입니다. 앞으로 최 사장님이 신에 대해서 그리고 그리스도교에 대해서 더 깊이 연구하실 때 원죄 문제는 밝혀질 것입니다. |
최사장 |
그럼 그것은 다음 과제로 넘기고, 자연의 무서운 재앙과 신의 존재는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까? |
박교수 |
신은 인간과 자연을 창조해서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면서 살 수 있도록 마련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대자연 속에서 소위 '신토불이(身土不二)'라는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자연의 재앙은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고 자연 질서를 악용하는 데서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어쩔 수 없는 자연의 재앙에는 좋은 면도 있고 나쁜 면도 있습니다. |
최사장 |
그런데 이 세상을 보면, 같은 세상인데도 미국이나 영국 같은 나라는 잘살고 아프리카는 못살고 불행한데 이러한 것은 어떻게 설명이 되어야 합니까? |
박교수 |
아프리카를 선진 문화 민족과 비교하면서 불행한 나라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행복의 기준이 무엇 입니까? |
최사장 |
행복이라는 것은 물질이 풍요하여 잘 먹고 잘 입고 잘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
박교수 |
천만에요! 돈이 많다고만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최 사장님은 아프리카에 가본 적이 있습니까? |
최사장 |
아직 그곳은 가보지 않았습니다. |
박교수 |
저는 아프리카에 세 번이나 다녀왔습니다. 특히 가장 어렵다고들 하는 중앙 아프리카를 다녀왔습니다. 정말 사는 것이 어렵고 비참했어요. 그런데 그들은 결코 불행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길거리에 다니는 아줌마들이나 아이들을 보면 입고 있는 옷이 거의 누더기 같아요. 하지만 그들은 자연스럽게 노래를 부르고 춤추면서 다닙니다. 아주 행복합니다. 행복을 절대로 물질적인 풍요에다 기준을 둘 수 없습니다. 아프리카인들은 항상 낙관주의자들입니다. 인생을 비관하고 자살하는 예는 오히려 서구 문명국가에서 주로 일어납니다. 아프리카 사람들 가운데 세상을 비관해서 자살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자연에 적응하고, 가난하면서도 세상을 아름답게 살아갑니다. 윤리 질서에 어긋나지 않으면서 자연과 더불어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
최사장 |
그렇습니까? |
박교수 |
사실입니다. 돈이 많다고 행복한 것은 아니지요. 우리 주위에 돈 때문에 불행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
최사장 |
교수님 말씀이 정말 맞습니다. 옛날에 가난하게 살 때는 행복했던 사랑이 돈을 벌면서 가정이 파괴되고 자신의 건강도 버리고 불행한 꼴을 당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
박교수 |
사실입니다. 돈이 인간 행복의 기준은 아닙니다. 물이 중요하지만 관리를 잘못하면 홍수가 되고 불이 중요하지만 관리를 잘못하면 화재의 원인이 되듯이 인간이 돈 관리를 잘못하면 돈이 불행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최 사장님은 이 세상 문제를 놓고 행복이니 불행이니 말씀하셨는데 우리 그리스도교에서는 영원한 생명 문제를 다루면서 영원한 행복에 희망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 부귀영화는 잠시 지나가는 사탕발림일뿐임을 알기에,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믿고 있습니다. |
최사장 |
그것이 뭡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