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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나 감자에는 전래자가 없어도

사랑의 기쁨 2012. 10. 24. 09:46

고구마나 감자에는 전래자가 없어도


문익점은 행운의 사나이다. 농작물 하나 전파한 공 때문에 그 이름이 500년 역사를 넘어 현대의 우리에게까지 전해지고 있으니 말이다. 사실 그가 전래한 목화는 우리나라의 의생활을 확 바꾸어놓을 정도로 혁명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전래된 고구마, 감자, 옥수수, 담배 등은 전래자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특히 과학기술이나 농업기술에 대한 대접이 시원찮았을 때 문익점은 목화 전파 하나로 생전에도 벼슬을 얻었고, 죽어서는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됨과 함께 영의정으로까지 추증되는 영광을 얻었다. 그의 두 손자 또한 과거를 거치지 않고도 형 문승로는 경상도 의성현령에, 동생 문영은 경상도 선산군수로 부임했다. 그야말로 목화씨 하나로 덕을 가장 크게 본 여말선초의 농학자다.

문익점이 중국의 강남에 유배갔다가 목화씨를 몰래 붓두껍에 담아 왔다는 것은, 오늘날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하나의 ‘야담’으로 취급될 뿐이다. 사실 [고려사]나 [조선왕조실록]등 그의 행적을 기록한 정사에는, 훔쳤다는 기록은 물론이거니와 강남에 갔다는 기록조차 없다.분명한 사실은 그가 원에 사신으로 갔고, 귀국할 때 목화씨 10여개를 소중하게 담아왔다는 것이다.

문익점은 귀국 뒤 공민왕과 부원파세력의 투쟁에 휘말렸는데, 운이 없게도 부원파로 몰려 파직당하고 고향으로 내려가야 했다. 이때 문익점은 장인인 정천익과 함께 목화재배를 실험할 수 있었다. 첫해 재배에서는10여개의 씨앗 중 단 하나만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씨앗이 다음에 열매를 맺어 100여개의 씨앗이 되었고, 수년간의 재배 끝에 목화의 국내재배가 가능해졌다. 이후 경상도 진주 강성현을 중심으로 경상도와 전라도 일원에 급속히 보급되었다.